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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아르떼 (2023): 현과 건반으로 무대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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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부터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인간의 영혼까지 앗아간 파멸의 시대에서 한음 한음 음표를 써 내려가야 했던 음악가들의 고통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는 자리였다. 맹렬한 악상과 극적인 표현, 정교한 호흡에서 비롯된 폭발적인 음향은 전시(戰時)에 인간이 느낄 만한 불안정한 감정들의 소용돌이로 단숨에 빠져들게 했다. 지난 22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예술의전당 전관 개관 30주년 특별음악회- 조진주&김규연 듀오 콘서트’ 얘기다.

오후 7시 30분. 만 17세 때 몬트리올 콩쿠르 1위를 시작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한 ‘콩쿠르의 여왕’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와 서울대 음대 교수인 피아니스트 김규연이 당찬 발걸음으로 등장했다. 첫 곡은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가 제1차 세계대전 중 완성한 최후의 작품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조진주는 시작부터 강렬한 음색과 시원시원한 보잉(활 긋기)으로 서늘함 속에 녹아든 열정적인 색채를 펼쳐냈다. 섬세한 터치로 끊길 듯 끊기지 않는 선율의 유려한 움직임을 만들어내다가 특정 음에서 돌연 소리를 거칠게 뽑아내면서 청중을 압도하는 역량은 일품이었다. 두 연주자 간 호흡에는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서로의 색채, 리듬, 표현 변화에 긴밀히 반응하면서도 작품의 견고한 구조와 짜임새를 살리는 순간은 놓치지 않았다.

다음 곡은 풀랑크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FP 119’. 스페인 내전의 희생자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에게 헌정된 것으로 반전(反戰)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다. 조진주는 마치 활로 바이올린을 때린다고 생각될 정도의 격정적인 보잉과 견고한 아티큘레이션(각 음을 분명하고 명료하게 연주하는 것)으로 작품에 담긴 풀랑크의 격앙된 감정을 펼쳐냈다.

비가(悲歌)인 2악장에선 잔잔한 울림을 만들어내는 피아노의 세련된 타건과 빙판 위를 날아들 듯 가볍게 움직이는 바이올린의 보잉이 프랑스 작품 특유의 몽환적 감성을 살려냈다. 3악장에선 날카로운 터치로 응축된 에너지를 증폭시키면서 극적인 악상 변화를 이끌었다. 전경에 자리할 때 명료한 음색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다가도 금세 소리를 줄여 기꺼이 후경으로 빠지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면밀한 앙상블은 입체적인 음향을 살려내기에 충분했다.

마지막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기억을 담은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1번’이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암울한 곡으로도 유명하다. 조진주는 활을 악기에 강하게 밀착시켜 만든 단단한 음색으로 주제 선율이 품고 있는 맹렬한 악상을 펼쳐내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힘을 빼고 가벼운 터치로 애절한 선율을 속삭이면서 작품의 다채로운 감정선을 펼쳐냈다.

2악장에선 무언가를 파괴하려는 것처럼 강하게 악기를 내려치는 소리가 강조됐는데, 두 악기의 냉소적인 선율이 서로에게 거칠게 달려드는 듯 공격적으로 표현되면서 속이 메슥거릴 정도 불편한 감정을 유발했다.

4악장에선 끊임없이 소리의 강약과 표현의 완급에 변화를 주면서 프로코피예프 특유의 기묘한 정취를 살려냈다. 음산한 색채와 저음에서 고음으로 솟구치면서 펼쳐내는 역동적인 악상이 대비를 이루면서 극도의 긴장감을 선사하다가 점차 음량을 줄여 탄식하듯 사라지는 연주는 깊은 여운을 남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날 조진주와 김규연이 들려준 것은 ‘파괴의 잔상’이었다. 직접 겪지 않았음에도 수십 년 전 그날의 참혹함을 생생히 마음에 새기도록 하는 그런 연주 말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무대였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Jinjoo Cho